시놉시스

낯선 풍경이 지나가고, 망각과 기억이 공존하는 장소에 다다른다. 기억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불완전하다. 만날 수 없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한 사람의 독백.

연출의도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

프로그램노트

태국, 그 이국의 땅에 세워진 철도 위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 아시아 점령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군이 건설했던 철도 위에서 연합군 전쟁포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스러져갔다. 건설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연합군 포로 6,982명은 깐짜나부리의 전쟁묘지에 안장되었고, 그들의 묘지 앞에는 작은 묘석과 초목이 세워졌다. 그렇게 역사는 그들의 기억을 써내려갔다. 철도다리는 시끌벅적한 관광명소가 되었고, 그들만이 공유하는 전쟁의 기억은 기념관의 유리장에 전시된 채로 기억의 재생을 이어 나간다.
그러나 전쟁의 역사는 늘 그렇듯 한쪽 눈을 가리고 있어, 나머지 반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 보이지 않는 반을 찾아 흘러간다. ‘빨간색 상자 안에 갇혀있던 삶, 6982가 아닌 삶, 463명의 한국인 여성들의 삶’을 찾아 기억의 틈새를 더듬는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그녀들을 이제 기억하려 한다. 아니, ‘기억한다’고 쓰려 한다.
하지만 역사가 외면한 기억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완만하지 않다. 그녀들의 얼굴, 그림자, 혹은 울음이 담겨있었을 공간들은 이미 제 모습을 바꾸었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녀들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이렇듯 공간이 지닌 기억이 희미해지자, 영화는 공간을 메웠던 사람들의 기억을 따라 나선다. 허나 어떤 이는 그녀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이는 그녀들을 불완전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기억한다’고 쓰고자 하나, 이미 지워져 버린 시간들을 마주하는 순간이다.
84년도와 96년도에 있었던 그녀들의 증언은 기억을 써내려가고자 하는 시도이고 뒤이어 나오는 현지인들의 증언은 망각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기억의 시도와 망각의 과정이 켜켜이 쌓여갈수록 우리는 그녀들의 기억이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화면 위로 죽음을 알리는 하나의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이미 그녀들은 기억을 시도할 수조차 없는 망자의 영역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영화는 이미 망자의 영역에 들어선 그녀들의 기억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지, 기억하기 위해서는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묻는다.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구석,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빈틈, 그 곳에서 그녀들의 기억을 온전히 만날 수 있을까. 영화 속 카메라가 조용히 읊어 나간 시의 끝에서 그 질문의 답을 찾고 싶다.

인디다큐페스티발2019 프로그램팀
나선혜

감독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