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놉시스

부산 미문화원은 일제 때는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오늘날에는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남아있다.
최면처럼 맴도는 현재의 일상과 일그러진 역사적 순간은 고스란히 부산근대역사관의 형상이 된다.

연출의도

이 영화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결합과 분할을 담고 있다. 유리창에 비춰진 삶의 형상들은 현재의 동일한 시간을 분할한다. 분할된 삶의 형상은 최면처럼 공간을 맴돈다. 매체에서 채집된 82년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부미방)의 형상과 오늘의 분할 된 삶의 형상은 일정한 파형을 이루어 낸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역사적 공간이 가지는 서로 다른 시간에 대한 구조적 성찰을 영화에 담았다.

프로그램노트

<상>(영제: Phase)은 오민욱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부산근대역사관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현재의 일상적 시간과 과거의 특정한 사건을 병치시킨다. 부산근대역사관 건물은 192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지어진 뒤, 해방 후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운영되었다. 1999년 한국 정부에 반환된 뒤 2003년부터 부산근대역사관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상>은 미문화원 시절이던 1982년 3월 18일 발생한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을 현재의 일상적 시간의 벌어진 틈새로 기입시켜 부산근대역사관의 형상을 새롭게 변형시킨다.
과거의 특정한 사건을 현재로 불러와 공간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이 영화는 과거 사건의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완벽한 설명은커녕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는 파편적이고 빈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완벽하게 설명되어 그 자체로 완결되어버린 역사는 더 이상 현재와의 접점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박물관 속에 박제된 기념품이나 신화로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파편적으로 주어지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현재의 일상적 시공간 사이로 끊임없이 파고들어 하나의 새로운 파동을 함께 형성하는 방식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역사탐구 방법론인 셈이다.
영화는 엄격한 구조 속에서 반복과 변주를 실행한다.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뉘고 그 앞뒤로 수미상관 방식으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쇼트들이 들어가 있는 구조다. 단락별로 일정한 구조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변주들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연쇄에 리듬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불어넣는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관습적 서사에 복무하거나 이미 완결된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 이미지와 사운드의 충돌 및 병치만으로 비관습적인 새로운 서사를 생성시키고자 하는 감독의 관심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이는 감독이 요구하는 역사탐구 방법론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노이즈 사운드의 적극적인 활용,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 엄격한 구조 속 반복과 변주 등은 현실을 그대로 기록하기보다는 변형시켜 새로운 감각과 직관을 향한 모험에 우리를 참여시킨다. 현실의 강한 상투적 이음새를 벌리는 작업은 바로 이런 모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벌어진 틈에서 우리는 새로운 과거를 발견한다. 우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파편적으로 주어졌던 정보들을 어느 정도 종합할 수 있다. 이 종합은 물론 파편들의 단순 총합을 초과하는 것이다. 모험의 끝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현재 부산근대역사관의 외관은 어느새 다른 단계(phase)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 웹진 리버스
김선명

감독소개